I

파리아

누가 그들을 버렸는가




 요즘 나는 pariah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몰입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소거된 사람처럼 우두커니 한 단어를 만나게 되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모르는 단어와 맥락을 발견하면 나는 무조건적으로 심취해서, 낯선 것을 내 일부로 만들기 위해 남용했다. 버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의 그 단어가 내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다라는 꽤 괜찮은 온라인상의 필명을 만들고도 느끼지 못했던 친밀감을 파리아를 통해 느낀다. 우울감이 짙은 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모든 창작품은 절망과 자기혐오 위에 뿌리를 내린다.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것을 토대 삼아 위로, 더 위로 뻗어나간다. 잭과 콩나무처럼 뻗어나간다. 태양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 애쓴다. 더럽고 냄새 나는 것을 비료 삼아 열매를 맺길 바란다. 모든 탄생은 으레 그렇다. 악취가 난다.


 나는 나를 갉아먹으며 글을 썼다. 모두 그렇다. 처음엔 자신 안의 응어리들을 해체시키기 위한 요량이었던 것이 한 인간을 해체시키게 된다. 창작에 대해 내가 경멸하는 몇 가지 소리들은 '창작의 고통'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 따위다. 한심하지 않는가. 저 낡아빠진 소리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한심하다. 창작은 고통스럽고, 배고플 때 작품이 나오며, 고통을 끝내기 위해, 배가 덜 고프기 위해 우리는 절필을 선언한다. 


 바닥을 파듯 글을 썼다. 내가 가장 활발히 창작했던 때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어떤 문턱을 밟고 서 있을 때였다. 아꼈던 사람들이 무너지고, 문단이라는 좁은 틈새에서 압살 당하는 걸 보았다. 자신을 가르친 선생, 선배 등의 남성들에게 짓밟히는 걸 보았다. 그 무렵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고발과 투쟁을 단순히 대단하다고 말하는 게 싫었다. 끔찍했다. 


 문단은 기울어진 채 작동되는 구조다. 물론 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기울어지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내가 그나마 가까이 서 있었던 곳이 문단이었으므로, 문단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가장 진보적일수록 가장 폐쇄된 공간이라는 말이 있다. 개방 혹은 창의성을 강조하는 곳일수록 구조는 더욱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어진다. "틀을 깨라"는 강요는 '틀'을 강조할 뿐이다.


 사람들은 문단이 고인 판이라고 하고, 고인 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사실이다. 쓰는 사람이 읽고, 읽는 사람이 쓴다. 이북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유입이 생기긴 했지만, 영화나 드라마, 웹툰, 웹소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문단은 여성을 착취하며 영역을 확장했다. 영역은 확장했으나 더욱 밀폐되어갔다. 좋은 작품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명작이라고 칭송했던 작품들의 대다수에 여성혐오가 있다. 혹은 명작가라고 칭송 받던 수많은 작가들이 잔인한 성폭력을 휘두르던 가해자였다. 예전엔 좋다고 했던 작품과 작가들이 이젠 역하다. 이 고인 판에서 고인 사람들은 스스로 질문하게 될 것이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인가.


 고발이 나온 사람들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줄줄이 이름을 읊을 수도 있다. 같이 글을 썼던 친구들을 만나 그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은 작가 협회에 이름을 올린 남성들의 명단을 읊는 것과 같아서 이내 지쳐버린다. 작가를 제외하고도 문단은 남성들이 남성들에게 더 많은 자격을 부여했고, 여초이니 남성을 뽑아야 한다는 얄팍한 변명들로 남성들만을 생존하게 했다. 내가 함께 글을 썼던 친구들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성들뿐이었다. 남성들의 끈기가 그들을 살아남게 했다고 말하지 말길 바란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우리만큼의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우리보다 더 큰 기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리한 여성들이 많은 여초 집단에서도 멍청한 남성이 감투를 쓰게 했던, 그런 기회 말이다. 


 여성 작가들이 열심히 여성 서사를 쓴다. 오랫동안 지속된 혐오를 환기시키기 위해 글을 쓰고 고발을 하고 틀렸다고 말한다. 그랬는데도 이상하게 절망감은 커진다. 많은 게 달라졌다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조금 개선하는 척하다가 다시 제자리다. 그래서 열심히 글을 썼던 사람들이 그만 쓰겠다고 한다.


 윤이형 작가의 이름을 쓰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됐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간절했던 시절, 우연히 윤이형 작가의 심사평을 읽은 적이 있다. 윤이형 작가의 글만큼이나 그의 위로를 애정했다. 이젠 그만 쓰겠다고 다짐했던 그때, 윤이형 작가 덕에 나는 조금 더 썼다. 써야 할 것이 남았다고 느꼈고 혼잣말을 하듯이 썼다. 내 목소리를 누가 들어주길 바랐고, 누군가에게 내 글이 위로가 되길 바랐다. 절대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에는 당선되지 않을 글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고작 내가 가졌던 사명감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미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던 여성 작가들의 사명감과 책임감은 어땠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가장 큰 비판은 '불매'이다. 문제가 발생한 기업과 사업체를 비판하기 위해 사람들은 불매 운동을 한다. 그만큼 강력한 운동이다. 여러 창작자들이 신춘문예를 비판하기 위해 신춘문예에 투고를 하지 않는 것도 그 맥락이다. 이미 작가가 된 윤이형씨가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 맥락도 다르지 않다. 열심히 개선시키고 나아가게 하려던 이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며 떠나는 것을 본다. 참담하다.  


 나를 계속 쓰게 했던 이가 쓰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무언가를 쓰고 있던 나는 서러웠다. 계속 쓰는 게 맞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내가 계속 쓸 수 있을까. 우리는 계속 할 수 있을까. 윤이형씨가 이곳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절했던 사람이라면 떠날 수밖에 없다. 버림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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