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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신앙 사이를 헤매는 이

박찬욱,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The Little Drummer Girl, 2018, 영국BBC, 6부작


 <리틀 드러머 걸>을 보려는 사람이라면, 약간의 지식을 습득하고 보는 편이 좋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보 없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면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겠지만 그 무언가의 실체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흐르고 있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역사는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시온)에 유대 민족을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에 이미 아랍인들이 거주 중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대립은  그로서 시작되었다. 시발점이 그러하다고 해서 이 문제를 키운 것이 오로지 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이 그들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며 결국 심각한 분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유대인은 명백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자 희생자이며, 그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강력한 피해자성과 피해의 역사가 유대인에게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로 하여금 약간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 혼란이 바로 <리틀 드러머 걸>의 본질이다.

 드라마의 배경은 1970년대 후반이다. 첫 시퀀스는 한 유대인(권력을 갖추고 있는)의 집이 테러를 당해 폭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유대인 남성은 마침 집 밖에 나와 있었고, 집 안엔 그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죽은 것은 유치원에 가지 않은 그 아이였다. 테러가 자해지던 순간에 그 집을 지켜보고 있던 한 아랍 남성과 백인 여성이 있다. 여성은 마치 스릴 넘치는 게임에서 승리한 듯 웃는다. 그 순간 집은 폭발한다. 시청자라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혐오하게 된다. 무고한 한 아이가 죽었으므로 저울이 기울어진 채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이다. 더불어 유대인의 아픈 역사가 더해져서 당신이 누구든 자연스레 유대인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한 유대인 경찰이 등장한다. 이 유대인 경찰은 웃음 짓던 백인 여성을 찾고, 그때 바로 무대 위에 선 배우 찰리가 등장한다. '그 여성이 저 여성'이라는 시선과 함께 찰리가 등장한다. 우리는 드라마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쟤 아니었는데? 쟤였나?" 따위의 의문을 품는다. 물론 이것도 박찬욱 특유의 혼란 야기 중 하나다. 그들이 찾는 것은 그 백인 여성을 연기해줄 '배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찰리에게 곧장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낯선 나라까지 가서, 한 매력적인 남성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 어디선가 등장해 찰리에게 자신과 함께 짧은 여행을 가자고 말한다. 찰리는 홀린 듯 그 매력적인 남성을 따라가지만 결국 유대인 경찰들에게 닿는 것이다. 그들의 스파이가 될 요량으로 말이다.

 이것이 1화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복잡하고 난해하며 '굳이?'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였으면 120분의 러닝타임 중 30분을 이렇게 할애해도 상관이 없다. 영화관에 들어간 이상은 나머지 90분도 좌석에 앉아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틀 드러머 걸>은 드라마다. 고작 6부작 밖에 안 되는 이 드라마를 어렵고 난해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결국엔 감독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조금은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박찬욱이 본인이 영화를 하던 습관을 못 버려서 일어나게 된 오류다. 드라마의 균형은 영화와는 달라서 1화에서 모든 것을 숨기려 들면 그 이후의 회차도 포기하게 된다. 억지로 견디고 본다고 해도 1화에서 느낀 첫 감상이 가장 강하게 남아 결과적으로 '난해하다'는 감상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적어도 서사, 인물, 배경 중 하나라도 선명히 제시를 해주는 게 드라마라는 장르가 가진 배려라고 생각한다. 이 비평을 시작하며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 또한 그러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배제되어 있기에 하게 된 말이었다. 과도한 친절은 불편하지만 적어도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은 창작자이자 제작자가 할 일이다.

 1화를 비판하고 있으나 이 드라마를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시 그들이 스파이로 섭외하고자 한 찰리 이야기를 해보자. 찰리가 바로 <리틀 드러머 걸>의 주인공이다. 그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로서 유대인도 아랍인도 아닌 영국 태생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애시당초 당사자성을 상실한 인물임을 말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찰리의 삶은 표면적으로 한 줄기도 맞닿아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찰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이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면 <리틀 드러머 걸>을 대체로 이해한 것이다.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을 발화하게 만든 국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아랍인들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두 쪽에 다 했다. 즉, 자격 없는 이중약속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나게 될 길고 긴 분쟁을 충돌시킨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찰리의 태생은 영국이다. 영국 태생의 찰리에게 유대인 조직은 스파이를 제안한 것이다. 

 찰리는 따분하고 지루한, 거짓으로 점철된 삶에 약간의 자극이 필요했다. 그뿐이었다. 스파이는 생각보다 매력적이고 피가 끓는 듯 자극적이었으며 폭력적이고 역겨웠지만 찰리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 일이었으므로 무관심하게 익사이팅 스포츠를 하듯 짜릿할 수 있었다. 신념과 사상, 신앙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찰리에겐 자극적이고 위험한 '게임'에 불과했을 것이다. 찰리는 단순하게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스파이가 되었고, 의도가 있든 없든 자연스레 유대인의 편에 섰다. 마음을 준 남성이 유대인이라는 것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아랍인들로 구성된 테러 조직의 수장의 동생, 그의 연인인 것처럼 연기하면 됐다. 첫 시퀀스에서 집을 날려버린 백인 여성이 바로 찰리가 맡게 될 배역이었다. 그 역할을 연기하며 조직에 깊이 침투하고 정보를 전달하면 됐다. 

 찰리는 뛰어난 배우였다. 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인 듯 보이고 또한 사실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결정권을 유대인 남성에게 넘겼다. 사랑 하나 대문에 저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매순간 깨닫게 만든다. 어찌됐든 그러한 찰리의 의존성과 수동성이 찰리의 뜨거움과 만났을 땐, 자연스레 훌륭한 스파이가 될 수 있어진다. 스파이에겐 신념과 사상 따위는 필요치 않다. 오히려 그것이 스파이로서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모든 결정권을 넘기고 시키는대로 움직이되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임기응변을 펼치는 것. 그게 바로 스파이였다.

 찰리는 위험에 빠질 때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들이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움직인다. 그는 실제로 심각한 고비에 빠지고 죽음의 위기를 수차례 넘긴다. 양쪽에서 동시에 시험에 든다. 자신을 스파이로 심은 집단과 자신이 스파이로 들어간 집단, 두 집단이 계속해서 찰리를 의심한다. 하지만 찰리는 시키는대로 움직인다. 무대 위에 올라선 이상,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하는 사람이 찰리의 주인이므로, 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감정의 파동은 크지만 사고의 지점에선 백색에 가까운 찰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청자들은 능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진다. 찰리를 따르던 여자아이와 찰리를 사랑해주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유대인 측에서 시행한 폭격으로 죽는다. 거기엔 어떤 정당성이 있을까. 죽임엔 어떤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찰리는 충격을 먹고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저 주위에서 들리는 죽음의 소리, 좌절, 울음들을 들려준다. 

 다시 첫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팔레스타인 인(+한 백인 여성)의 테러로 죽음에 빠졌던 한 아이가 기억 나는가. 우리는 그 아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꾸 유대인의 편에 서게 됐을 수도 있다. 그들은 꽤 이성적이고 품위가 있어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런 사고를 가지긴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는 그 판단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고 흩어지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 나는 그들 중 어느 누가 옳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잘못됐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해와 피해가 명백하게 뒤섞일 때,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저울질을 하고 싶지 않지만 저울질을 하게 된다. 누구의 잘못이 더욱 큰지 말이다.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은 말 그대로 테러를 계획한다. 유대인 지식인과 유대인 참석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곳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찰리가 있다. 찰리는 믿음직한 중요 인물로 설정되어 폭탄을 전달하는 배역 속의 배역을 맡게 된다. 드라마 안에 드라마가, 그 드라마 안에 또 다른 드라마가 등장하고 어디에서나 찰리는 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결말 속 박찬욱의 태도는 명백하다. 그는 두 집단이 모두 잘못되었으나 더욱 잘못한 것은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사살된 것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수장이었다.

묘한 것은 유대인 그리고 아랍인들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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