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

기다림 속 부유浮遊

올리비에 아사야스,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2016, 프랑스, 105분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는 미국인 퍼스널 쇼퍼다. 여기서 퍼스널 쇼퍼란, 유명인들의 의상을 관리하는 직업을 일컫는다. 화려한 세계 속 주인공들의 들러리라면 으레 그렇듯 모린의 삶 또한 무미건조하다. 정확히 말하면 생동감을 느끼기 힘들다. 그런 삶을 과연 모린이 원하고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모린은 왜 파리를 떠나지 못할까.

 애도가 사라진 시대에 애도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애도가 발생할 수 있고, 애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할지. 애도가 가지는 거대한 동일성이 존재하는 만큼 애도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이다. 한 개인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절대 동일한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돌아오는가. 모린은 죽은 자신의 쌍둥이 오빠를 기다린다. 이 아이러니한 문장 속에서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오롯한 공감일 것이다. 우리는 늘, 이미 떠난 이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어쩌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역할을 나누는 주제는 기다림일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기다릴 수밖에 없고 기다려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애도와 추모를 혼동하지만, 애도와 추모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지속적으로 애도가 재정의되고 애도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까닭은, 추모와는 다른 맥락이다. 애도는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작업이 아니다. 애도 속엔 고통, 슬픔, 상실감이 있다. 즉, 죽음이 미치는 파동을 함축한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도는 고요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린은 자신을 영매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영매로서 명확한 현상을 목격하거나 능력을 발휘하진 못한다. 쌍둥이 오빠가 자신이 먼저 죽게 된다면 꼭 나타나겠다고 약속했으니, 모린은 기다린다. 어쩌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기때문에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빠를 다시 만나기 위해선 수많은 불확실성을 믿어야만 한다. 영매여야 하고,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결국 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모린이 기다리는 것 중 선명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즉,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확실성이 아닌 불확실성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쌍둥이의 영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 있다. 이성적 논리로 바라보자면 그 말은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주위의 쌍둥이들을 떠올려보자면 수긍하게 된다.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강력한 끈이 존재한다. 운명으로 묶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같은 순간에 태어나 함께 살아갔으므로 그들은 필연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쌍둥이'는 나의 일부로 해석된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운이 좋다면 우리는 나의 일부처럼 상대방을 사랑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혹은 내가 그 사람의 일부로 구성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사라진다면, 나의 일부도 함께 죽어버리고 만다. 그 자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가 바로 애도의 연장선상이다. 어떻게 빈자리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오빠의 죽음 이후 모린의 삶은 부유하고 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고, 늘 피곤해 보인다. 그 공허 속에서 모린의 집착과 욕망은 커진다. 모린은 오빠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못하고, 패션에 대한 욕망은 커져나간다. fashion은 passion을 불러일으킨다. 모린은 늘 아름다운 옷가지와 장신구들 가까이에 있지만 그것들을 구성하고 조달해주는 역할이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노출될수록,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욕망은 커진다. 

 화려하고 타이트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은 사실 코르셋 그 자체로 해석된다. 활동성 있고 편한 옷을 입고 있던 모린이 몸매를 잡아주는 타이트한 코르셋을 착용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모린은 전과 달리 화려하고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여성상에 들어맞게 아름다워보인다. 모린은 고용주가 입을 옷을 착용한 상태로, 자신의 고용주의 화려한 침실에서 자위를 하다가 쓰러져 잠든다. 잠재되어 있던 욕망을 모린이 실현하는 동안 우리는 '들킬까봐' 불안하다. 욕망은 그런 것이다.

 왜 이 욕망을 실현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거듭 불확실성이 커져가며 모린은 굴레에 갇힌다. 갑갑하지만 떠날 수 없는 굴레 안에서 느리게 쳇바퀴를 굴린다. 오빠를 만나려 했지만 오빠가 아닌 어떤 분노하는 영혼과 접촉해 공포스러워했고, 오빠의 연인(아내)에겐 또 다른 연인이 생겼다. 쌍둥이 동생 모린은 절대 그것이 질타 받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미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연락이 온다. 익명의 사람이,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익명성 앞에서 모린은 자신이 간절히 그리워하는 오빠를 소환한다. 그것은 믿음에 가깝다. 섬뜩한 스토킹 문자에도 부유하는 모린은 간절함을 담고, 그 익명성에 자신의 쌍둥이를 투영한다. 두려움 속에서 진심을 꺼낸다. 뭐라도 부여잡고 싶은 간절함이 느껴진다. 모린은 자신도 모르게, 절대 오빠일리 없는 고압적인 상대방 앞에서  말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전엔 몰랐던 욕망들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결국 이 영화는 두 가지 부재를 담고 있다. 쌍둥이와 모린 스스로의 부재다. 모린의 빈 틈을 채워주던 쌍둥이가 사라졌으므로, 이제 그 여백을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은 순전히 모린의 몫이 된다. 

 단 한 번도 용기내서 드레스와 장신구를 몰래 입어본 적 없는 모린은 그것을 단 한 번 입고 난 뒤에 미묘한 해소의 지점을 찾는다. 뭔가에 홀렸다고 말할 수 있어진다. 솔직히 말해 여성들은 코르셋이 조여지길 강요 당하는 삶을 산다. 모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화려하고 빛나 보이는 것은 언제나 파괴의 성질을 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를 각오하고 욕망한다. 스스로 코르셋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옳지 않다. 그 욕망이 그른 것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빛나는 것을 욕망할 수 있으나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이 되어선 안 된다. 

 아름다움이 가진 파괴력을 모린이 곧장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 모린은 드레스를 착용하고 쾌락을 느꼈으며 쉽사리 멈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옷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고용주의 집을 찾았을 때, 그 모든 욕망의 결과를 본다. 자신의 고용주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린은 자신이 선망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됐을 것이다.

 고용주를 죽인 범인과 모린에게 익명의 문자를 보낸 사람은 고용주의 (섹스) 파트너였다. 그는 모린의 고용인에게 앙심을 품고 계획적으로 모린에게 접근했으며, 모린까지 파멸의 길로 이르게 하려 했다.  여성을 파괴하려는 남성은 얼마나 잔혹하고 비루한가. 그제야 모린은 부유하는 자신을 현실세계에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어진다. 그대로 죽임 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린이 모든 걸 놓고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세계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일부와 소통한다.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앟았다. 늘 조금만 이상한 것에도 쌍둥이를 투영했던 모린은, 아무도 없을 때 깨진 유리잔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조금씩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모린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가는 일이다. 살아가기 위해선 종종 우리는 의심스러운 정확 속에서도 의심을 끊어내야 한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애도다. 그러나 그 주제에 모린을 함몰시키지 않으며, 애도 위에 모린의 삶을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내 삶은 당신의 삶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모린의 삶은 다시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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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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