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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의미

자비에르 르그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Custody, 2017, 프랑스, 93분


 단언컨대  이 영화는 '재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야 한다. 한 치의 과장도, 왜곡도 없었으므로. 가정폭력을 겪은 사람들이라면 힘겹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게 될 것이다. 숨통이 막혀서 영화 보기를 중단하고 싶어질 것이고, 정말 중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재현은 그렇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창작의 범주에서 과장과 왜곡 없이 작품을 만들기 쉽지 않으며, 만들어 낸다고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끝까지 견뎌냈다면 나처럼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리게 될 것이고, 다 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됨과 동시에 기특하게 여기게 될 것이며 쉽사리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영화는 사회적으로 권력을 지니고 있는 남성이 가정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짓누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랜 시간 폭력과 폭언, 강압적 태도와 불안을 겪은 이들은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끊임없이 약자를 결박하려 드는 (남성)권력은 피해자들을 달아나게 만들고 도망가게 만든다. 직접 만나서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왜 저렇게 당하고만 있지?' '왜 저렇게 순종적이지?' '너무 답답한데?'라는 생각을 했을 테고, 안타깝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존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위협과 협박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면 거절하는 일마저 쉬울 수 없다. 거절 또한 접촉을 통해 가능한데, 피해자에겐 가해자와의 접촉만으로도 폭력이 된다. 만약 피해자들이 조금 더 격렬하게 대응하고 저항했다면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이름을 여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남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때리고 짓밟고 죽였을 것이다.

 나는 폭력을 행사한 이들이 자신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경멸한다.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변화를 확신하며, 무엇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선심 쓰듯이 분노를 몇 번 제어한 것을 변화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나조차도 나를 미워하게 될 만큼 심각한 휴머니즘의 노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인간을 향한 기대를 놓지 못한다. 나는 늘 누구나 변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러기를 바라지만, 가해자들이 자신을 변했다고 말하는 순간엔 내가 믿고 싶어했던 이상들이 무용지물되는 것을 느낀다. 변하고 싶다면 나아져야 할 게 아닌가. 나아지지 않았으면서 달라졌다고 믿는 이들은 모두를 악화시키기만 한다.

  늘 느끼지만 국가와 사회, 제도는 가해자와 남성을 보호한다. 당사자들이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칭하며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은 채 억지로 만나게 한다. 판결은 언제나 뒤늦고, 자명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증거가 없다면 폭력을 무효화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뒤늦게 대안을 제시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이 곳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폭력이 지속되고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사람이 겪는 PTSD를 조명한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났던 장면은 조세핀(딸)의 생일파티에서, 조세핀이 노래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다. 조세핀은 시종일관 엄마를 쫓는다. 엄마가 파티장을 빠져나가자 노래를 부르면서도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이모가 파티장을 나갔다 들어오고, 다시 나갈 때마다 조세핀은 더욱 불안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과 불안이 내재화된 것이다.  즐거운 날에 즐거운 일을 하면서도 온전히 안전해질 수 없다.

 모자母子가 잠든 집에 그 사람이 나타나 미친듯이 초인종을 누르고 이내 장총을 들고 올라온다. 놀랍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다. 모자는 혹시라도 문이 열릴까봐 안쪽에서 문을 막아서고 두려움에 떤다. 이때 영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인 앞집에 거주 중인 노인이 등장한다. 그는 재빨리 경찰에 신고를 하는데, 정확하게 주소를 말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 안에서 그를 감시한다. 감시는 언제나 중요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문을 열지 않자 결국 문을 향해 총을 쏜다. 모자가 다치든 말든 위협을 느끼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만이 우선시되며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냐며 소리나 지를 뿐이다. 뒤늦게 피해 피해 당사자인 미리암이 살려 달라고 경찰에 전화를 걸지만, 공포감에 주소를 말하기도 힘들어 한다. 경찰이 시키는대로 욕실의 문을 잠그고 문 앞을 막고 욕조 안에 납작하게 눕는다. 그 사람은 어느덧 집 안으로 들어와 욕실 앞에 서 있다. 문을 향해 총을 겨누는 순간, 경찰이 그를 제압한다. 다시 돌아와 앞집에 사는 노인이 재빨리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경찰은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들이닥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 폭력을 겪고 있다면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여 개입하려는 노력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노인은 사건이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본다. 어쩌면 그가 오랜 세월을 여성으로 살며 겪은 폭력들이 그 순간 그를 재빨리 신고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폭력이라는 것은 늘 겪은 만큼 보이고 들리므로.

 이런 영화가 늘어날수록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자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영화가 가해자들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피해자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피해자인 줄 모르던, 혹은 어떻게 그 굴레를 벗어나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러한 재현을 지지하게 된다. 견디게 된다. 우리는 체험 해야만 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변화하고 나아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작은 욕조 안에서 입을 틀어막고 웅크리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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